피카소, 게르니카의 탄생 배경과 구조

 천재 화가, 입체파의 창시한 거장 파블로 피카소는 92세로 사망하기까지 수많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그는 20세기 가장 유명한 예술가로 그의 그림은 누구봐도 개성이 강했습니다. 2차원의 도화지에 3차원의 입체적인 여러 가지 모습으로 표현법은 전 세계의 미술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고 화려하고 감각적인 색감 역시 그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의 작품  중 유독 회색톤의 어두운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1937년에 완성된 게르니카입니다.  게르니카는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349X776.6cm크기의 이 거대한 그림은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고 위압감마저 들게 합니다. 무채색 계열로 통일된 색감이 음울하고 공포감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1. 게르니카의 탄생 배경 게르니카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그려졌습니다.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통해 전쟁의 잔혹감과 죄 없는 시민들의 희생에 대한 분노를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무채색의 황페화된 그림 속에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면서 전쟁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차별적인 희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위치한 게르니카는 1937년 4월 26일 무차별 폭격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 스페인 제 2공화국에 반란을 일으켰고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파시스트 국민군을 나치 독일이 지휘하게 되면서 군대의 직접 명령권이 독일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나치 독일을 전쟁에 사용될 폭탄과 전투기의 성능을 실험하고 스페인 공화국을 방해하기 위해 3차례에 걸쳐 게르니카를 폭격합니다.  폭격 이후 도시의 대부분 파괴되었고 민간인 사망자 1645여명, 부상자 889여명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인구의 1/3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희생자였습니다. 2. 그림의 구조 게르니카의 기본 구도는 고대 신전 건축의 페디언트처럼 삼각형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삼각형의 틀을 중심으로 상처를 입고 몸부림치는 말이 등장하고 말의 얼굴 옆에는 램프가 보입니다. 그 중심에서 왼쪽 바...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에 담긴 의미

편지를 손에 쥐고 욕조 안에서 힘없이 늘어진 채 사망한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의 표정은 고통스럽게 보다는 오히려 온화합니다. 그림 속 남자의 정체는 당시 언론인이자 자코뱅 파의 핵심 단원인 장 폴 마라 입니다.

마라는 당시 자코뱅 파의 핵심 당원으로 늘 귀족과 왕당파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는데 혁명이 무력이나 피를 보게 해서는 안된다는 지롱드 파와는 반대되는 개념이었습니다. 이런 팽팽한 의견 대립은 마라를 죽이는 것이 프랑스를 살리는 것이라 생각한 지롱드 파의 샤를로트 코르테는 목욕 중인 마라를 살해합니다. 같은 자코뱅 파의 회원이었던 다비드는 마라와 친분이 있었고 자코뱅 파의 일원들과 함께 마라를 추모하기 위한 그림을 남깁니다. 그렇게 '마라의 죽음'이 탄생합니다.

'마라의 죽음'은 1793년 완성되어 현재는 벨기에 브뤼셀 왕립 미술관에 소장 되어 있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 마라의 죽음

그림은 심플한 배경 처리와 불필요한 것들은 과감히 생략해 인물에게 집중하게 합니다. 거기다 빛은 마라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죽음을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마라의 손에 든 편지를 통해 마지막 순간까지 일을 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얀 두건과 원단은 순결함을, 초록은 순수, 브라운은 숭고함을 의미합니다. 마라 옆 나무 테이블에는 '마라에게 다비드가'라는 글귀가 새겨 넣어 그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그림은 목욕 중 살해 현장을 표현하고 있지만 의미와 이미지는 혁명의 순교자로 그려집니다.


> 다비드의 의도

그러나 실제 마라의 죽음은 그림처럼 아름답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림은 오직 다비드의 상상력과 정치적인 계략이 질 녹여져 있습니다. 

당시 왕정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프랑스 시민들은 크고 작은 봉기가 발생했습니다. 시민의 편이었던 마라의 죽음은 시민들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죠. 다비드는 동료 마라의 죽음을 통해 마케팅 효과를 노렸습니다. 마라의 죽음을 숭고하고 아름답게 표현해 프랑스 시민들이 혁명에 동참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는 그림으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명확하게 전달합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자크 루이 다비드

> 자크 루이 다비드

신고전주의 화풍을 사랑한 화가, 

프랑스 격변의 시대 혁명에 가담한 화가이자 동시에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쥔 화가

역설적이게도 변절자라는 주횽 글씨가 새겨진 화가 

사람들은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술과 정치의 유착을 이용해 화가로서는 최고의 정점까지 갔지만 그의 마지막은 더없이 초라했습니다.

다비드는 강렬하고 뚜렷한 형태를 표현한 고전주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주로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을 그렸는데 '소크라테스의 죽음', '파트로클로스의 장례식', '나폴레옹 대관식'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그려내며 많은 명작들을 남겼습니다. 성격이 강한 다비드의 그림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고 귀족, 왕족 조차 그의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다비드는 정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혁명 정부인 국민 공회의 의장으로 활동을 하고 황제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지기까지 합니다. 그의 정치적인 행보는 항상 그에게 이익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794년 격변기의 프랑스는 자코뱅 파의 로베스 피에르는 인민의 적으로 간주되어 처형당하고 다비드도 감옥 생활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혁명이 느슨해질 때 쯤 시민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고 그 시기를 때맞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지도자로 등장합니다.

나폴레옹은 화가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유는 당시 자신의 영웅적인 모습과 선전을 할 수 있는 게 그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눈에 띄어 전속 화가로 활동합니다. 나폴레옹과는 정치적인 성향은 전혀 달랐지만 재능만은 인정했습니다.

그렇게 나폴레옹도, 다비드도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렇게 절대 권력을 쥔 나폴레옹도 몰락을 하고 유배를 가면서 다비드의 권력도 몰락합니다. 눈치가 빠른 다비드는 발 빠르게 벨기에로 망명해 죽을 때까지 프랑스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한 때는 황제의 화가로, 혁명가의 화가로 관심을 받았지만 다비드가 사망하자 그의 그림들은 프랑스에서 완전히 외면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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